본격적으로 한가지 주제를 놓고 공부를 하다보니, 한 책에서 작가가 인용, 참고하고 있는 다른 책과 다른 작가의 저서가 연달아 궁금해지는 일이 자주 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케이트 밀렛, 주디스 버틀러 등 지금까지 훑어 본 굵직한 페미니즘 사상가들이 공통적으로 검토하는 이론이 두 가지 있다.
여성 해방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분석과 입장, 그리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다.
주로 두 가지 이론을 수용하거나 한계를 지적하는데, 프로이트의 원전을 읽을 마음은 아직까지 없고,
가족 사회학을 전공하려고 생각하니 엥겔스의 <가족, 사적소유, 국가의 기원>은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주문을 했다.
생각보다 책이 얇아서 당황했는데, 총 9장으로 이루어진 원전에서 1장과 2장만을 담은 책이었다. (맙소사)
대신 얼마 전 읽은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철학서보다 훨씬 쉽게 읽히는 글이었다.
엥겔스는 먼저 작고한 마르크스가 미국의 인류학자 모건의 연구 결과에 대한 주석을 달아 놓은 자료를 참고로 하여 이 책을 저술했다.
사회가 야만->미개->문명 단계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각각 군혼->대우혼->일부일처제라는 가족 관계가 발생하였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군혼의 관계를 형성하였던 이유로, 그는 고등 척추동물이 보이는 '수컷들간의 질투' 가 집단의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므로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가 서로를 공유하는 형태가 적합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한 야만에서 미개로 넘어가던 시대까지는 모계 사회였다고 주장하고 그에 따라 여성의 지위가 높았을 것이라 추정하는데 단혼이 아닌 관계에서 자녀의 아버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댄다.
농경과 목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잉여 생산물에 대한 사적 소유가 발생하면서 당시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던 남자들에게 더 큰 권력이 생기고, 남자들이 자신의 자녀에게 직접적으로 재산을 상속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모권제가 부권제로 바뀌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이제 재산유지(상속)의 측면에서 자녀의 아버지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여성은 정조를 지켜야 하고 여성에게 일부일처제가 강제된다. 남성에게는 실제로 일부일처제가 아닌 까닭은 여성에 대한 정조를 지킬 의무가 없었고, 매춘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는 이에 대한 반발로 간통이 많았다) 결혼의 전제는 개인적 성애가 아니었으며 철저하게 경제적 이유 때문에 혼인 관계가 성립되었다.
결혼의 성격은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바뀌게 된다.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계약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평등한 인간을 필요로 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당시 개신교에서는 종교 개혁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 를 중요한 도덕적 가치로 전파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결혼은 이제 상호간의 성애에 기초하며 부부 간의 자유로운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된다.
본래 일부일처제는 소수 유산 계급 남성의 사적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형성된 것이므로 사적 재산이 사라지고, 남자의 경제적 지배가 소멸되면 완전한 여성 해방이 올 것이라고 예견한다. 결혼에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 뿐이며, 사랑에 기초한 결혼만이 도덕적이라고 한다면 사랑이 끝난 관계는 자유롭게 이혼을 할 수도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1,2 장의 내용이다. 이후 페미니스트들은 엥겔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반박을 한다. 인류학의 발달로 고대에 대한 더 많은 증거가 발견됨으로써 과거 모권제 사회가 일반적이었다는 주장이 부정되고, 성별 분업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가볍게 넘어간 문제를 지적한다거나, 사회가 투쟁과 갈등을 동반하는 변증법적 과정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야만-미개-문명의 단계로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변화해 간 것 처럼 접근한 방법, 남성의 성욕은 적극적이고 공격적이며 여성의 성은 수동적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등이 비판 받는다. 하지만 이 책의 번역자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야 날개를 편다'는 헤겔의 문장을 들어, 과거의 이론은 그 시대적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언급하며 <가족, 사적소유, 국가의 기원 그 이후> 를 고민해 보자고 제안한다.
책을 읽는 내내 드디어 내가 엥겔스까지 읽는구나 하는 지적 짜릿함보다는 이 깊고 깊고 길고 긴 여성 혐오의 역사 속에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 이미 19세기에 마르크스, 엥겔스 뿐 아니라 밀 같은 사람도 결혼은 여성에게 노예가 되는 길이며 여성이 육아와 가사에 매이는 한 가정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줬는데 왜 21세기에 고등 교육을 받은 나는 마흔이 다 되어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나 싶어 괴로운 마음이었다.
어떤 여성이 인생에서 굉장한 성취를 이루었다면 그것은 자투리 시간을 정말 잘 활용한 결과라고 했는데, 육아와 가사를 완전히 떠맡은 상태에서 자투리 시간을 내어 공부하는 내가 과연 이 분야에서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인가. 얼마나 더 나를 갈아넣어야 할까. 인류 역사 내내 고통 받았던 여성들은 왜 아직도 내 주변에서 똑같이 고통받고 있는가. 이들을 구원할 길이 있는걸까. 교육과 돌봄을 공적 영역으로 넘긴다고 여성의 책임과 부담이 덜어질까. 그것이 가능하며 바람직한 시나리오일까.이 시대 여성이 새롭게 짊어지게 된 정서, 정신 노동은 얼마만큼인가. 숱한 -유쾌하지 않은 질문들이 머리를 맴돈다.
동독과 구소련에서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적극 장려하기 위해 각종 사회 제도를 정비했으나 결국 여성은 집안일과 바깥일을 동시에 떠맡게 된 원인, (의식이 제도를 따라갈 수 없는 것인가. 본래 제도가 의식을 이끈다고 하지 않았는가. 의식의 변화가 먼저인가 제도의 변화가 먼저인가) 모건이 분석한 사회 제도와 가족의 형태 변화가 동아시아 지역을 배제하고 있는데 우리 역사에서 가족과 남녀 관계의 변화에 대한 연구는 얼마나 이루어져있는지 등을 더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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